셰리 (Cheri, 2009) : 감정에 빠지지 말 것 - 그걸 드러내서도 안 된다 Movies

셰리 (Cheri, 2009) ☆☆☆ 
 

[셰리]는 오랜 만에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와 각본가 크리스토퍼 햄튼 그리고 미셸 파이퍼가 함께 일하게 된 작품입니다. 20여 년 전에 햄튼이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위험한 관계]을 전환점으로 해서 각각의 경력을 충실히 쌓아 왔던 그들이 다시 같이 모여서 지난번처럼 시대극을 만들었다고 하니 동창회 같은 인상이 절로 드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배경은 다르지만 본 영화도 [위험한 관계]처럼 예의와 의상 속에 감추어진 감정에 대한 드라마이지요. 그 때 자주 만들어져 왔던 여느 시대극들처럼 화려한 볼거리인 영화는 재치 있는 대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잘 굴려가는 가운데 상당한 복고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햄튼은 우리에게 [지지]로 알려진 소설가인 콜레트의 소설 [셰리]와 그에 이은 소설 한 편 이 둘을 압축시켜서 각색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동안 프랑스 파리에는 유명한 고급 창부들이 있었고 프리어즈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도입부에서 그 시절에 활동했던 여러 직업여성들의 경력들을 짤막하게 하는데, 레아 드 롱발(미셸 파이퍼)도 다른 여성분들처럼 경력을 성공적으로 쌓아왔었습니다. 나이도 벌써 50을 바라다보니 그녀의 경쟁자였지만 이젠 친구가 된 펠로 부인(캐시 베이츠)처럼 그녀도 은퇴해서 편하게 살 수도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남자들을 끌 수 있는 그녀 위력이 완전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녀는 가능한 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가 펠로 부인으로부터 레아는 21세기 우리나라 어머님들께선 꿈에도 생각하지도 않을 부탁을 받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철없는 방종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다 큰 아들인 프레드(루퍼트 프렌드)를 맡아서 좀 남자답게 만들어달라는 것이지요. 여느 감정 서비스 업계들 종사자들처럼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레아는 사람 됨됨이는커녕 그게 아예 없는 듯한 프레드에게 흥미를 느끼면서 그에게 접근하고, 고수 앞에서 프레드는 매우 기꺼이 그녀에게 끌려갑니다.

  원래는 짧은 서비스로 계획되어 있던 그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오래 가고, 그리하여 6년이 지났는데도 별명이 '셰리'('자기')인 30세 프레드에게 있어서 55세 레아는 어머니와 연인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때가 오게 됩니다. 펠로 부인은 이제 할머니가 되고 싶어 하고 그리하여 곧 프레드는 어머니가 주선한 에드미(펠리시티 존스)와 함께 결혼합니다. 그러니 레아와 프레드는 자신들의 관계를 끝내기로 했지만 감정이란 게 쉽게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레아가 속한 세계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사치이자 본인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닫힌 세계 안에서 같이 얘기할 상대라고는 자신과 같은 업종에서 일했던 사람들 밖에 없지만, 그들이 모일 때도 그들은 마치 연극을 하는 양 밝은 분위기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기만 하지 속내를 전혀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서 자신을 낮추는 것보다 차라리 감추면서 속 앓는 편을 택합니다. 레아는 프레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진실함을 깨닫지만, 그녀는 아무런 일이 없다는 양 하면서 사교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프레드도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놓쳤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런 멜로드라마에서 충분히 예상되다시피, 그들은 씁쓸함을 맛보면서 나중에 회한에 젖게 되지요.

  콜레트의 원작 소설들도 뒤에 숨겨진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햄튼과 프리어스는 그에 맞추어 절제되고 초연한 분위기 속에서 암시된 감정들을 짧게 분출하곤 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미셸 파이퍼는 오랜 만에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딱 알맞은 역을 맡아서 근사한 호연을 합니다. 90년대 초 이후로 경력이 꽤 부진했다가 최근 [헤어스프레이] 등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파이퍼는 이제 50대 아줌마가 되었고 그녀의 손과 눈가만 봐도 나이 먹은 티는 절로 보이니 슬프기도 하지만, 감정을 억제하는 동안에 얼굴 표정과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영화 속의 그녀 모습만 봐도 연기력은 여전히 변함없다는 게 잘 보여 집니다.

 그녀에 비해 프레드를 맡은 루퍼트 프렌드는 파이퍼와 비교하면 부실하다는 이유로 그리 많이 좋은 평을 듣지 않았지만, 그가 맡은 역이 처음부터 껍데기에 가까웠음을 고려하면 그런 비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각본상 프레드는 정신적으로 덜 발육한 백지장 상태나 다름없으니 그에게 무슨 개성이나 카리스마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지요. 그리고 철없는 애답게 그는 레아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순진한 부인의 감정을 별다른 생각 없이 잔인하게 긁어대곤 하고 여기서 프렌드는 효과적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배우들도 역시 좋은데 특히 캐시 베이츠는 여러 장면들에서 즐겁게 튀는 조연 연기를 합니다.

  [셰리]는 작지만 안과 겉으로 나무라 댈 없이 잘 꾸며진 시대극 소품입니다. 다리우스 콘지의 부드러운 촬영에 의해 보여 지는 아르누보 풍의 앨런 맥도널드의 세트나 데니스 쉬넥의 의상은 꼼꼼한 면이 절로 보이는 가운데,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자아냅니다. 이렇게 조성된 세상 안에서 영화는 거리감을 두면서 감정을 엿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나 덤덤하게 결말을 알려 줄 따름이지만, 이로 인해 생기는 반향은 예상보다 큽니다. 아무리 진실한 감정도 거부할 수 없는 한 사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지요.


덧글

  • 일공 2020/03/06 13:30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좋게 봤던 영화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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